사라지는 은행창구, 진화하는 금융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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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July 2025
김병국 Partner

김병국 Partner

Samil PwC, South Korea

최근 몇 년간 금융권의 눈에 띄는 변화 중 하나는 사라지는 은행 지점이다. 익숙한 거리 곳곳의 은행 간판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그 자리에 프랜차이즈 카페나 공유 창고가 들어서는 모습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변화의 핵심에는 디지털 금융의 일상화가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 은행의 점포 수는 2018년 6,900여 개에서 2023년 말 기준 5,200여 개로 줄었다. 약 5년간 1,700개 이상이 문을 닫은 셈이다. 특히 2020년 이후 코로나19 팬데믹을 기점으로 비(非)대면 거래 비중이 급격히 늘면서 물리적 창구의 필요성은 빠르게 줄어들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2023년 지급결제보고서에 따르면 전체 금융 거래의 93.4%가 인터넷·모바일 등 비대면 채널을 통해 이뤄졌다. 이는 2018년 84.3% 대비 9%p 이상 증가한 수치로, 금융 이용 행태 자체가 디지털 중심으로 급변했음을 보여준다. 이제 고객은 굳이 지점에 가지 않고도 계좌 개설, 대출 신청, 환전, 투자까지 대부분의 금융 서비스를 처리할 수 있게 됐다.

 

‘공간의 전환’에 주목하는 해외 은행

은행 입장에서는 지점의 운영 비용 절감이 매력적인 선택지다. 인건비, 임대료, 유지관리비 등을 고려할 때 연간 수십억 원의 비용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효율성이 모든 고객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하지는 않는다.

한국소비자원의 2023년 조사에 따르면 60세 이상 응답자의 43%가 ‘모바일 뱅킹 사용에 어려움을 느낀다’고 답했다. 특히 지방 중소도시나 농어촌 지역에서는 현금자동입출금기(ATM)조차 없는 ‘금융 사각지대’가 점차 확대되고 있다. 국회 예산정책처가 분석한 결과, 전체 은행 지점의 75%가 수도권 및 대도시에 집중돼 지역 간 금융 접근성 격차는 오히려 심화되고 있다.

은행 점포 축소는 국내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미국의 웰스파고, 체이스, 뱅크오브아메리카 등은 2010년대 중반부터 이미 수백 개 지점을 폐쇄했고, 유럽, 싱가포르, 일본 등도 유사한 흐름을 따르고 있다. 다만 이들은 단순한 폐쇄보다 '공간의 전환'에 주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영국 CYBG 은행은 맨체스터에 ‘B Works’를 열어 지역 주민을 위한 코워킹 공간, 요가 스튜디오, 팝업 전시공간 등으로 탈바꿈시켰다. 이곳은 금융 상담 창구보다 더 많은 방문자 수를 기록 중이다. 또한 스페인 이매진뱅크는 ‘이매진카페’를 바르셀로나 중심가에 열고, 게임룸, 미디어존, 전시 공간, 커피숍 등을 결합해 젊은 고객층과의 접점을 확장하고 있다. 싱가포르 OCBC은행은 ‘프랭크 스토어’를 MZ세대 전용 매장으로 기획해, 음반 가게처럼 꾸민 공간에서 금융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들 사례는 ‘금융은 필요하지만, 전통적 지점은 필요하지 않다’는 소비자 인식 변화에 대응한 결과다.

 

점포 변신을 시작한 국내 은행

국내 주요 은행들도 비슷한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하나은행은 서울 을지로 지점을 ‘하트원(H.art1)’으로 리모델링했다. 이 공간은 1층은 카페와 ATM, 2~3층은 미술품 전시 공간, 4층은 고객 커뮤니티 공간, 5층은 루프탑 레스토랑으로 구성되어 있다. 금융과 예술, 휴식을 아우른 이 공간은 고객 유입뿐만 아니라 브랜드 이미지 제고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내고 있다. 같은 하나은행의 ‘라운지 1968’도 광주 지점을 개조해 시니어 고객을 위한 음악 감상실, 도서관, 금융 교육장 등으로 구성한 문화 복합 공간으로 활용 중이다.

국민은행의 ‘KB청춘마루’는 대학로 인근에 4층짜리 공간을 마련해 카페, 공연장, 루프탑 쉼터, 전시관을 운영 중이며 청년 고객의 창작과 휴식 공간으로 주목받고 있다. 우리은행의 ‘원 레코드(WON RE:CORD)’는 LP 청음 부스와 전시 공간을 접목한 복합문화점포로, 금융업의 감성 접점을 탐색하고 있다. 또한 ‘굿윌스토어’라는 장애인 근로사업장을 건립해 장애인 1500명에게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신한은행도 사회적협동조합과 손잡고 ‘카페 스윗 쏠(SOL)’을 점포 내에 설립해, 발달장애인 고용과 지역 밀착을 동시에 실현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단순한 점포 활용이 아닌, 금융기관의 ‘사회적 역할’과 ‘브랜드 경험’을 재정의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사회적 메시지를 넘어서 브랜드 신뢰도 상승, 고객 충성도 강화, 유휴 공간의 자산 가치 유지, 이종 산업과의 융합 효과 등 경제적 효과로도 이어질 수 있다. 실제로 하나은행은 하트원을 개소한 이후 해당 건물 유동 인구가 32% 증가했고, 인근 소상공인의 매출은 평균 15% 상승했다.

 

‘지역 앵커 플랫폼’으로 재탄생한 컨설팅 사례

삼일PwC 딜 부문이 자문한 A은행 OO지점도 복합 전환의 대표 사례라 할 수 있다. 이 지점은 인근 상권 쇠퇴, 금융 수요 저하 등으로 폐쇄 가능성이 논의됐던 곳이었다. 그러나 건물의 입지적 가치, 역사성, 지역 네트워크를 감안할 때 단순히 철수하는 것은 아쉽다고 판단됐다.

삼일PwC는 OO지점의 점포를 재정비하는 것만이 아니라, 금융과 문화, 행정과 복지가 교차하는 '지역 앵커 플랫폼'으로 재탄생 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지역 작가 전시, 청년 예술인 공연, 창업 컨설팅을 할 수 있는 지역 소통 중심의 복합공간 △일대일 금융코칭과 스마트폰 교육 등이 가능한 고령층을 위한 디지털 금융 교육 공간 △지방자치단체 민원 서비스, 세무·법률 상담 부스를 통한 공공서비스 연계 △외부 인구 유입을 유도하는 루프탑 활용 △건물 리모델링을 통한 랜드마크화 등의 전략을 제안했다.

이 컨설팅 사례는 공간 폐쇄 대신 공공성과 민간 수익성의 균형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시도라 볼 수 있다. 또한 지자체, 지역문화단체, 중장년층과의 복합 커뮤니티 전략을 수립했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향후 이 모델은 국공유지 및 유휴 금융자산 활용의 모범 사례로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

지점은 끝났는가, 아니면 진화하는가

디지털 기술은 빠르게 바뀌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특히 은퇴세대나 금융 취약계층에게 은행 점포는 단순한 창구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낯선 기술 대신 ‘사람을 만나는 곳’이자, 경제생활의 안전망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은행 점포의 미래는 소멸이 아니라, 전환에 달려 있다. ‘물리적 점포’는 금융 거래의 주요 무대에서 물러나지만, 지역 커뮤니티의 플랫폼, 교육과 문화의 결합 공간, 또는 중장년층의 디지털 역량 강화 거점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 단순히 지점을 줄이는 것이 아닌, 점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금융 생태계를 설계해야 할 시점이다.

은행은 돈을 관리하는 곳이지만, 동시에 삶을 관리하는 역할도 한다. 디지털과 비대면이 일상이 된 시대일수록, 우리는 오히려 더 깊고 따뜻한 접점을 필요로 한다. 공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더 나은 역할을 찾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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